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맞으며

2024. 1. 22. 03:56VIDA

귀에 Galli Poli의 노래가 들리는 순간 블로그에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새해가 밝은 날부터 생일이 슬슬 기다려지곤 했다. 삼 주 조금 덜 지나는 날에 내 생일이 있으니 신년을 만끽하다 보면 어느새 생일을 맞는다. 이번 생일은 그러지 않았다. 느긋히 세종에 내려왔다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일정. 여건이 된다면 세종에 조금 더 머물겠다는 다짐 정도의 계획으로 이번 생일을 보낼 준비를 마쳤다. 케이크도 대단한 케이크 없이 집 앞에 있는 마트에서 골랐다. 그냥 부모님과 얼굴 보고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생일 선물이려니 하면서 집 앞 강을 바라보는 여유를 만끽하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다. 이번 생일은 그랬다.
 
세상에 사랑할 것들이 너무 많은 나머지, 자칫 외로울 수 있는 순간에 사랑하는 것들에 닿을 때 쉽게 행복하다. 때론 그게 음악일 수도, 가족과의 시간일 수도, 집 앞에 흐르는 강물일수도.
 
카카오 선물하기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이제 국룰이다. 우린 이제 너무 멀리 있지만, 기술은 참으로 잘 발달했으니 우리 그걸 이용해 보자. 하는 마음. 누구까지 챙겨야 하나, 어디까지 챙길 수 있나 하는 고민이 있다는 핑계로 주변의 생일을 챙기지 못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늘 스스로 핑계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어느샌가 대뜸 메시지만 보내는 것이 민망해져 버렸기 때문인가 싶다. 한동안 챙기지 못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러던 이번 생일은 어찌 선물보다도 장문의 메시지를 더 받았다. 아무래도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 사업한다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난 탓인지 응원의 메시지도 참 많았겠구나 싶다. 그 틈으로 우리 꽤나 낭만을 얘기했던 사람들이 내 주변에 이렇게나 많았나 싶던 메시지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제 주변은 취업의 갈림길에서 발을 딛기 시작했고 그 지난 챕터에 대한 소회 같은 것들, 그것을 비롯. 사람과 사랑을 얘기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가볍게 외국에서도 축하가 여럿 있었다. 선물은 필요도 없었기에 말이 우선 좋았고, 이 말들 중에도 깊이 있는 말들은 또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스페인에 언제 와 프랑스에 언제 와 이탈리아 언제 와하는 질문에 단 하나도 명확히 답을 하지 못하고 (당연하게도) 형식적 축하메시지로 치부하며 몇몇 대화를 마무리하거나, 그중 조금 더 애틋한 문자들에는 감정을 적신다.
 
시모네는 요즘 참 힘들어한다. 나보다 더한 스페인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번에도 오랜 시간 전화하던 오후 무렵에 그의 뒤로 울리는 종소리에 나는 그게 바로 네가 즐길 것들이라 했다. 이름 작은 이탈리아의 한 마을에서 할머니가 해주는 뇨끼를 먹으며 강아지와 뛰어놀거나 친구들과 호숫가에 자전거 타러 가는 네 삶 말이다. 유럽인이면 감사한 줄 알아라. 하는 오만 방자한 말을 던지고선 다시 함께 스페인을 추억한다. 시모네는 정말 헛소리를 많이 하는데 요즘은 한국어로 번역해서 메시지 보내기에 맛 들렸다. 시모네가 올린 스토리와 메시지는 둘 다 올릴만한 내용들이 아니라 생략하기로 했다.
 

 
후안마는 몇몇 사진들을 뒤적거리다가 스토리에 올릴 사진을 잘도 골랐다. 세르히오 위에 올라탄 장면은 잊고 있던 장면인데 결국 사진은 잊힌 기억을 불러오고 기억난 기억은 그 순간의 향기를 불러온다. 역-마들렌 효과라고 혼자 이름 지어 본다. 사진을 보고 '나 참 행복해 보인다' 하니 그래서 찍은거라고 후안마는 '소리아 효과'란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곳 소리아. 그렇게 침대 맡에서 여러 대화를 나누곤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에 후안마가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후안마와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있다. 친구보다는 형제 같아서, 사랑하기도 정말 많이 사랑했고, 크게 싸우기도 했다.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인종차별이 없는 편이라 생각하는데 (국민성 자체가 누구랑 싸우는 상황을 굉장히 싫어하는 듯싶다), 한번은 내가 당했던 인종차별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죽일 듯 나서는 그 모습이 걱정도 되었지만 고맙기도 했다. 반대로 후안마가 마약에 취한 사람에게 크게 다칠 뻔한 상황이 있었는데 의경 때 만취한 사람 상대하는 거랑 비슷하다 생각해(절대 아니다) 그걸 막으려다가 얼굴에 크게 상처가 났었다. 결과적으로 되돌아 말해보니 이 외에도 서로가 감동했던 순간들이 있고 그 위에 우리의 쌓여왔던 시간이 이 관계를 만들어 낸 것이라 생각한다. 주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맥주 마시러 나가, 하엔의 거리를 휘젓고 밤을 새워 놀았고, 새벽의 취기에 케밥 먹던 그날의 공기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엔 테라스에서 햇볕을 쐬며, 말라가의 땡볕을 걸으며, 마드리드의 네 어릴 적 추억을 더듬으며 나눈 대화를, 적어도 그 순간의 감정을 난 기억 한다.

 
벌써 2년이 흘렀다. 과거가 될 것이란 걸 똑똑히 알았던 그 순간들이라지만 벌써 2년이 흘러버렸다. 정말 금방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시간은 너무도 빨랐고 인생은 멋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말은 바뀌었다. 얼른 돌아와 함께 다시 그때처럼 지내자는 말에서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여전히 사랑받으며 잘 살라고, 그러다 어느 날인가 겹치는 순간에 잠깐이나마 함께하자고. 나는 돌아가겠다는 확답을 남기지 못하고, 언제 가겠다는 답을 남기지 못하고, 평생을 네가 내게 보여준 스페인을 고마워하며 살 것이다 했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은 그렇게 지났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듯한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기만 했어도 감사했을 것을, 여기저기서 던져대는 사랑을 받는라 정신없이 행복했고, 이건 또 결국 내 삶의 동력이 되었구나.
 
생일이 지나면 늘 겸손해진다. 내가 세상에 던진 말들과 감정에 비해 받는 것이 많다. 내가 좋아서, 내가 사랑해서 다가간 그들이 나를 좋아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일까. 특히나 요즘 내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너무도 멋진 길을 걸어가고 있고, 사업하는 과정에서 정말 대단한 삶을 살아왔거나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잦아지다보니 더 차분해지는 것도 같다. 아무렴 용감히 서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던지는 말 한마디는 크다. 친구들의 한 마디는 어릴 적의 그것에 비해 늘 한소끔 무게를 더해서 왔다. 성장하는 이들이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나는 무엇이 더 자라났을까 하며 되돌아보곤 겸손해진다.
 
계속 고프다.
사람인가 사랑인가. 성공인가 여유인가. 배가 고픈가. 아무렴. 참 고프다. 근데 이 상태가 참 좋다. 굉장히 나아가고자 하므로. 그렇게 열심히 지금을 사랑하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 하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VID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년 2월의 끝에서 잠깐  (24) 2024.02.29
경기장 속에서  (35) 2024.02.06
부사는 참 좋으니  (4) 2023.12.04
immersed_몰입된  (2) 2023.08.18
아메리칸드림, 실리콘밸리는 달이 참 크다  (0) 2023.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