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ersed_몰입된

2023. 8. 18. 17:12VIDA

최근에 주호형의 초대로 Burlingame부터 Menlo Park에 이르는 메타 본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은 하루가 있었다. 뷔페식으로 제공되는 밥은 맛있었고, 태깅만하면 필요한 전자기기가 무한 제공되는 그 유명한 자판기도 봤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사무실의 책상 결, 들어오는 햇볕의 각도까지도 훑으며 잔뜩 흥이 났던 그날,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에는 하필 길을 잘못들어 구글 본사 단지 안에 갇히게 됐는데, 그 단지의 크기는 마을이라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커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빙빙 도는 경험은 썩 웃기기까지 했다. 메타 퀘스트 안에 잔뜩이나 빠져 게임과 워크스테이션을 경험했을 때에는 새로운 장난감을 만났을 때의 기분을 꽤나 오랜만에 느꼈음에 진심으로 감동하는 요즘. 요즘 내 일상은 이런 몰입의 연속이다.
 

MPK 21, Menlo Park

 
다시금 창업길에 들어서서 적응하기 정신없던 초반을 지나, 당신들이 어떤 사람인지가 조심씩 잡혀가고 내 역할이 조금씩 만져진다. 서구의 일상을 유럽으로 치환해놓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미국이라는 인풋이 물밀듯 쏟아져오니 이제 내게 서양은 미국과 유럽으로 완전히 양분되었고, 미국이란 나라가, 아니 적어도 Bay Area의 삶은 이제야 어떤 형체인지가 만져지기 시작한다. 주호형이나 형을 통해 만난 근처 사람들이 여기서 삶을 꾸리고 주말을 만들어가는 모습. 지성이형이 보여준 이 곳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지역들. 이렇게 시야가 깊고 넓게 한번씩 틔이는 것이 첫번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스타벅스 직원에게 구태여 말 한두마디를 더 붙인다든지하며 진심에서 비롯된 웃음을 나눌때면 '너는 나랑 이런 마주침을 평생 상상이나 했겠니' 하는 혼자만의 만족감을 느끼고, 이들의 일상을 싸매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했음에서 나타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괜히 기분이 좋기도 한 것이 두번째 이유다. 일을 할때면 두세시간씩이 훅 가있고, 정신을 차려보면 일주일이 가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이곳의 하늘과 선선함도 이제는 조금 자취를 감추고 더위를 뿜어내는 것이 문득 느껴진 것을 본다. 내가 완전히 몰입해 있다는 것임에 대한 증거.
 
이럴때 스스로 늘 상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고마움이다. 오후 여섯시 즈음 워킹스페이스에 앉아있으면 2층 창가 아래로 퇴근버스에서 내려 지나가는 애플직원을 보는게 얼마나 꿈꿔왔던 일인가. 메타 오피스를 이렇게 깊숙이 들어가는 경험이 얼마나 가슴뛰는 일인가. 차가 있던 무렵에는 그렇게 십수년을 영상으로만 바라봐도 가슴이 뛰던 애플파크를 10분이면 도착해서 슬그머니 바라보며 일하는 건 또 어떤 행복인가. 스탠포드 메디신 스쿨 옆에 있는 근사한 카페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며, 집에 가는길에 테슬라 지사가, 아침 운동을 나가면 구글본사가 등장하는 것이, 내비를 놓쳐 잘못든 길에 퀄컴이 있는 것이 이게 말이 되는 일들인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디테일하고 우발적이며 다채롭고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의 일상은 많이도 벅차다. 숨을 좀 들이 쉬고 하늘을 본다든지 땅을 본다든지, 일종의 의식으로 이곳에 존재해 본다. 기분이 좋다.
 

Apple Visitor Center

 
다만 취해있지 말아야할 이유는 다분하다. 아직 회사는 돈을 벌고있지 않고, 나는 비자도 없어 당장 내년엔 어디서 어떻게 일하고 있을지 아무것도 모른다. 개발을 엄청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을 엄청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영어를 엄청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마케팅을 엄청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 나는 스스로가 제너럴리스트임을 안다. 스타트업의 초반에는 제너럴리스트, 다시 말해 잡부가 할 일이 많아 오만군데 필요할 수 있지만 프로덕트가 성장해 갈 수록 회사는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하고 초반에 제너럴함을 뽐내던 이의 스페셜티는 결국 프로덕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게으를 수 없다. 내 비즈니스가 만나는 고객군이 살아 숨쉬는 생태계를 피부로 저릿하게 느끼면서도, 결국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하는 일. 끊임없이 공부해야하면서도 그걸 가지고 고객들과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어야 하는 일. 그러므로 내겐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취하지 말아야한다. The Dean에 산다고, 눈 앞에 수영장이 펼쳐져 있다고, 교회에 빅테크 엔지니어가 판을 친다고 내가 돈이 많은게 아니고, 내가 여유로운게 아니고, 내가 실력이 좋은게 아니다. 나는 나고, 내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결핍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성장을 바란다. 늘 오늘 배우는 것들을 복기하고 내일은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주변에 널린 빅테크의 인재들, 사업의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 꿈만 같던 사람들과의 인연들은 내게 동력을 아주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면 기도한다.
 
그러므로 몰입은 좋다. 몰입하면 아플새 없고, 몰입했다는 건 한 눈 팔 새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어나 시리얼 먹으며 지성이형 추천 팟캐스트로 영어와 이 판을 깨치는 것이 여유로운 아침의 행복을 의미하게 된 이 시간에 대한 몰입. 그리고 이 시간이 훌쩍 지나고 뒤돌아 봤을 때 큰 뼘 씩 자라있던 지난 날들이 주는 확신이 있다. 주변이 주는 불안에 한 눈 팔기보단 내 일에 몰입하는 것. 난 그게 참 좋다. 갈 길이 멀다. 내일은 또 얼만큼 빠져들까.
 

절대 잊지 못할 이날의 "붉은 노을"